2021년 1월 10일 일요일

그럼 어디 한 번 가볼까?

 프란츠는 시종의 뒤를 따랐다.

 

드넓은 복도를 걷다 보니 곧 거대한 본궁이 나왔다.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었다.a

 

두 개의 커다란 은상이 그 본궁 앞에 서있었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빼든 기사의 형상.

 

아론 제국이 기사의 나라로 불리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프란츠는 그 곳을 지나쳐 본궁에 입장했다.

그리고 그 즉시 드높은 천장을 마주했다.

 

거대한 백색의 공간.

용이 머무는 곳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 그 공간의 끝에는 커다란 권좌가 있었다.

 

그 권좌의 주인이 눈을 떴다.

턱을 괸 채 상념에 빠져있던 모양이었다.

 

어느덧 그 바로 앞까지 다가간 프란츠가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가장 영명히 빛나는 태양, 카헤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곧 투명한 은안이 프란츠를 향했다.

황제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래, 아일린··· 그 아이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과연 제국의 주인.

황제가 풍기는 기운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숨길 수 없는 주름에도 가려지지 않는 권위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프란츠는 전혀 주저 않고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먼저 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감히 폐하를 속였습니다.”

 

황제의 표정에 흥미가 떠올랐다.

 

“속였다?”

 

“예. 폐하. 어머니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롯이 폐화와의 독대를 끌어내기 위한 이야기였습니다.”

 

“발칙하구나.”

 

하지만 그 말과 달리 황제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프란츠가 말했다.

 

“하여 감히 요청합니다. 폐하를 속인 죄, 그 벌을 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상을 요청하는 자는 봤으되 벌을 먼저 요청하는 자는 처음이구나. 허나 나는 그리 우둔하지 않지. 어디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다행히 기대대로였다.

그제야 프란츠는 본론을 꺼냈다.

 

“전선으로 가겠습니다.”

 

“전선?”

 

황제의 표정에 의문이 깃들었다.

 

하지만 프란츠는 분명하게 다시 말했다.

 

“예. 전선에 가서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순간 황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눈빛이 마치 프란츠의 말에 담긴 저의를 추측하는 듯했다.

 

“기특한 마음가짐이다. 허나 제 배를 채워가는 자들만이 경계될 뿐, 지금의 제국은 평화롭고 풍족하다. 아니면 너는 지금 내게 군권을 달라 이야기하는 것이냐?”

 

프란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제국을 떠받드는 세 수호가문 중 하나의 일원. 그리고 최근 북부 국경선 너머에서 교전이 잦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교전이라···”

 

잠시 침묵을 지키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그런 사소한 사안을 내게 요청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정 그리 원한다면 직접 공작에게 요청하면 될 터인데.”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지점이었다.

 

유목민들과의 교전은 북부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꼭 황제의 뜻이 아니더라도 프란츠는 교전에 참여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북부를 수호하는 바실리의 차기 후계자.

그 자신이 원한다면, 그리고 공작의 허락을 맡는다면 전장으로 나서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공작은 내가 전장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프란츠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제 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너무 많으십니다. 하지만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그에 일찍이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감히 나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냐? 그것도 아버지의 뜻에 반하고자 하는 작은 모험심을 가지고?”

 

하지만 프란츠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각오를 찬찬히 들여다본 황제가 곧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 일찍이 너와 같이 발칙한 소년을 본 기억은 없구나. 하지만 좋다. 짐은 야망과 능력을 겸비한 자를 높이 평가하지. 그리고 너는 어제와 오늘 그 모두를 증명했음이야.”

 

그리고 프란츠에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

 

프란츠가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그 답을 알고 계십니다. 제게 명예기사 직위를 내린 것. 그와 비슷한 혜택을 주십시오. 다만 어느 정도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말에 황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다.”

 

허락의 말이었다.

프란츠는 깊숙이 고개를 더 숙일 뿐이었다.

 

“폐하의 은혜에 황공하옵니다.”

 

그렇게 둘의 독대가 끝난 후.

혼자 남은 황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2황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쌍한 놈.’

 

후궁 소생인 제 위치를 자각하듯 능력을 숨기고 사는 녀석이었다.

 

동시에 한 때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첫째 아들 레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아픈 손가락은 젊었을 적 그를 쏙 빼닮은 2황자 테오도르 쪽.

1황자 레온은 제 어미인 오캄푸스 쪽을 더 닮았다.

 

그러니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황제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두 은안이 번뜩였다.

 

1황자에게는 이미 오캄푸스라는 외척 세력이 있었다.

 

‘이제는 그 균형의 추를 맞출 때.’

 

그것을 위해 황제는 프란츠 바실리에게 날개를 달아줄 셈이었다.

 

 

***

 

 

룰루랄라.

그런 콧노래가 들려왔다.

 

여관 주인 엠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엄청 신나계시네요.”

 

그 말에 콧노래를 부르던 남자가 답했다.

 

“어떻게 신나지 않을 수 있겠나.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여관에서 벗어나는데.”

 

“엑?”

 

놀란 표정의 엠마를 보며 그가 말했다.

 

“벌써 한 달인가. 나쁘지 않았어. 언젠가 다시 한 번 들릴 정도로.”

 

엠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대금은 제대로 치루고 가실거죠?”

 

사내가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오, 나를 마치 한량 취급하는군. 걱정말게. 나 엔디미온, 기사도의 신의를 빼면 시체뿐인 사람이니.”

 

그 능청맞음에 엠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사는 무슨 얼어죽을···’

 

눈앞의 능청스러운 남자가 기사라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는데요?”

 

엔디미온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내 영혼의 주군을 모시러.”

 

그 처음 보는 진지함에 엠마가 멍해졌다.

 

그것도 잠시.

짐을 번쩍 든 엔디미온이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자, 대금일세.”

 

엠마의 손에 톡하고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부리나케 그 주머니를 확인하는 엠마를 뒤로하고 엔디미온은 여관 밖으로 나섰다.

 

“그럼 어디 한 번 가볼까?”

 

오늘따라 쨍쨍한 햇빛을 느끼며 엔디미온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그의 옷주머니에서 뭔가 하나 떨어졌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황궁의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글쎄 토너먼트에도 참가했었다니까. 내가 바로 방랑기사 엔디미온이라고.”

 

남자의 옷차림을 쭉 위아래로 훑어본 병사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방랑기사면 난 방랑왕이다. 허튼 수작말고 썩 꺼져.”

 

그 말에 엔디미온은 씩씩거리며 자신의 가슴팍에 있을 신분패를 찾았다.

그런데.

 

‘어?’

 

신분패가 없었다.

엔디미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병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결국 엔디미온은 터덜터덜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여관에 돌아가자 엠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뭐예요? 영혼의 주군을 찾으러 간다고 폼은 다 잡더니.”

 

“하늘이 주군과 나의 상봉을 방해하는군, 엠마.”

 

엔디미온이 힘없이 대답했다.

 

“들어오기나 하세요.”

 

엠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엔디미온의 주군이 될 사람은 참 불쌍하다고.

 

 

***

 

 

그 날 저녁.

프란츠는 카엔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카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프란츠는 웃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가끔씩 손이 시린 것만 빼면요.”

 

“다행이군요. 걱정했습니다.”

 

루이넬과의 대결에서 입은 상처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문득 카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손이 시린 이유는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축하합니다. 프란츠.”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의 그는 평온했다.

 

물론 익숙한 감각은 아니었다.

손가락에 닿은 찻잔이 평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문득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요.”

 

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제가 오러 2성에 올랐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런 프란츠의 말에 카엔이 답변을 내놨다.

 

“저는 의지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

 

“의지라···”

 

카엔이 오해는 말라는 듯 덧붙였다.

 

“물론 뒷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오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지가 없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의지가 있는 법입니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나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 그런 것들도 훌륭한 의지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역시 오러를 깨닫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라고 저는 생각해봅니다. 다시 말하면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이지요.”

 

다소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씩 이해가 갔다.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부러지지 않는 검을 든 남자의 이야기가 카엔의 이야기 위로 겹쳤다.

 

‘그러고 보니.’

 

문득 프란츠는 한 가지 궁금증을 떠올렸다.

 

그는 시합 중 이상한 공간으로 떨어졌다.

거기서 잿빛늑대 펜리르를 만났다.

 

그리고 펜리르는 그들의 만남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오러 3성의 경지에 이른 카엔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

 

그런 의문에 프란츠가 물었다.

 

“혹시 저와 루이넬의 대결 중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셨습니까?”

 

“이상한 낌새라니··· 무슨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 표정에 이미 대답이 나와 있었다.

프란츠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한 번 물어본 것입니다.”

 

카엔이 피식 웃었다.

 

“어쩌면 촉각의 초감각을 개화해 예민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카엔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찻잔이 비어있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그리고 그 말을 마치고는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혼자 남은 프란츠는 생각에 잠겼다.

 

그 카엔마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과연 그가 만난 것은 진짜 잿빛늑대 펜리르였다.

 

‘그것이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 현상.’

 

프란츠는 문득 그 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늦지 않은 시일 내에 찾아오라고 했었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로 찾아오라고 했는지는 선명히 기억났다.

 

‘두 절벽이 만나는 곳.’

 

그건 과연 어디를 가리키는 말일지.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이 나왔다.

 

“알 수 없군.”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알 수 없다는 거야?]

 

그 소리를 들은 프란츠의 몸이 굳었다.

순식간에 그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솟아났다.

 

“누구냐.”

 

하지만 방 안에는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또 다시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냐니, 나 말하는 거야?]

 

그 소리에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프란츠였지만.

역시 아무런 이상함도 찾아내지 못했다.

 

혼란에 빠진 그에게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안했군.]

 

신기하게도 엣헴엣헴거리는 소리가 같이 딸려왔다.

 

[소개하지. 내 이름은 바스키. 위대한 주신 아론님의 파편이시다.]

 

그 뜬금없는 말에 프란츠가 반문했다.

 

“파편?”

 

이제 목소리는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마치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하지만 거기에 호기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프란츠는 경계심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정체부터 드러내라.”

 

대답은 빨랐다.

 

[뭔 정체? 난 네 목에 걸려 있잖아.]

 

그제야 프란츠는 턱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아아- 들리나?]

 

정말 목걸이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한 번 가볼까?

 프란츠는 시종의 뒤를 따랐다.   드넓은 복도를 걷다 보니 곧 거대한 본궁이 나왔다.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었다.a   두 개의 커다란 은상이 그 본궁 앞에 서있었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빼든 기사의 형상.   아론 제국이 기사...